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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청년학생 기고글

오늘날 4•3항쟁을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

 

오수민 (제주도 출신 청년)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4•3항쟁은 제주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그 실체를 제대로 알기 어려운 무언가였다. 정방폭포, 성산일출봉, 모슬포 등 학살의 기록은 제주 어디에나 있었다. 그러나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것인지, 누구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아빠는 가끔씩 나에게 “제주 사람은 4•3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 “이승만이랑 미국놈들이 제주 사람들을 다 죽였다”고 비밀스럽게 목소리를 낮춰 말하곤 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는 이미 국가 차원의 사과가 이뤄졌으므로 왜 아빠가 이토록 비밀스럽게 이야기하는 건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국가 차원의 오랜 역사 왜곡과 탄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후에 알게 되었다.

점잖고 말이 없으시던 할머니는 내가 중학생 때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 치매에 걸려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우리 집에 오시게 됐다. 기억을 잊고 어린아이로 돌아간 할머니는 밖에서 어린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에게 “오빠가 언제 오냐”고 여러 번 묻곤 했다. 후에 이 이야기를 들은 아빠는 놀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할머니는 살아 생전에 오빠 이야기를 한번도 직접 입에 올린 적이 없다고 했다. 아빠는 마을 어르신을 통해 할머니에게 오빠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할머니의 오빠는 4•3항쟁에 가담했다가 탄압을 피해 오사카로 이주한 후에 북으로 갔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이 되고 싶어 했던 큰아빠는 연좌제로 앞길이 막혀 술에 취할 때마다 할머니를 찾아와 원망했고 할머니는 평생 본인이 죄인이 된 것처럼 모든 말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우파들은 여전히 4•3항쟁을 ‘빨갱이’들의 ‘폭동’이나 북의 지시로 여긴다. 최근 국민의힘 소속 의원 태영호의 역겨운 발언도 그 맥락이다. 이런 역사 왜곡은 끔찍한 학살의 기억, 전쟁과 그 이후 이어진 독재정권의 역사 왜곡 앞에서 숨죽이며 목숨을 부지했던 사람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에 다시금 소금을 뿌리는 짓이다.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국민의힘 정치인들을 비롯한 우파들이 이토록 왜곡하고자 하는 4•3 항쟁의 진실은 무엇이고 오늘날 우파들은 왜 다시금 역사 왜곡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 오늘날 4•3을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해방 직후 한반도의 상황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해방 정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한반도에 해방이 찾아왔다. 일본이 떠난 자리에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이 들어와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38선 이남에는 미군정이 수립되었다. 일제가 떠난 자리에 들어온 미군정은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한반도를 통치했다. 그러나 미국이 들어오기 전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통제가 무너지면서 생긴 권력 공백을 배경으로 자치 조직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런 맥락에서 생긴 ‘인민위원회’는 1945년 12월 경 7개 도, 12개 시에서 수립되어 치안과 행정, 교육 등 실질적인 정부 구실을 했다. 해방 직후 독립운동을 하다 수감된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감옥에서 풀려나 이 새로운 자치기구 건설에 적극 나섰다.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이 벌어졌다. 일본인 자본가들이 도망간 자리에 노동자들은 공장을 접수해 통제하기 시작했다.

 

미군정과 한반도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소련을 봉쇄하는 정책을 폈다. 미국은 남한을 대소련 봉쇄 전초기지로 여겼다.

당시 트루먼의 배상 특사로 극동을 순방 중이던 폴리 대사는 1946년 6월 22일 트루먼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조선은 소국이며 미국의 군사력은 지극히 부분적인 책임만 맡고 있지만 아시아에서 미국의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 이데올로기의 전쟁터입니다. 조선은 실패한 봉건 체제의 도전에 직면해 경쟁력 있는 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할지, 아니면 다른 체제, 즉 공산주의가 보다 강력해질지 시험하는 장소입니다.”

이에 트루먼은 7월 16일 “본인은 귀하가 (남한이) 아시아에서 우리의 전체 성공이 달려있는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라는 데 대해 의견을 같이 한다”고 답했다.

이런 미국에게 좌익들이 주민들의 신뢰를 받으며 주도하는 인민위원회와 같은 자치 조직은 눈엣가시였고, 이들은 곧 조선인민공화국과 자주관리 운동 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미군 철수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도 남한을 소련 봉쇄의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곧 분단을 의미했고, 이는 해방 후 독립국가 수립이라는 한반도 주민들의 열망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제주 4•3 항쟁은 이를 배경으로 벌어졌다.

 

4•3 항쟁의 전개

제주에서도 ‘인민위원회’는 1945년 11월 9일 미군정이 제주도에 들어오기 이전 이미 도내 유일한 정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인민위원회’를 주도한 대다수는 일제 강점기 투옥 생활을 하거나 일본에서 노동조합 운동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치안과 도로 정비 등 행정과 학교 설립 등을 담당하며 실질적으로 제주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듬해, 제주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왔다. 일본에 갔던 사람들 약 5만 6천명이 귀국해 인구는 증가했는데 일본과의 교역이 중단되고 산업 시설이 파괴되어 제조 업체 가동률이 해방 전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46년에는 보리도 흉작이라 식량도 부족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이 미곡 수집령을 내리자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쌓여왔다. 이를 배경으로 1947년 3월 1일에 열린 제28회 3.1절 기념 시위에 2만 5000명~3만 명이 참가했다.

대회가 끝난 후 거리 행진 중 어린아이가 경찰이 탄 말에 채여 넘어졌고, 이에 항의하는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하고 진압해 6명이 사망했다. 미군정은 발포자를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대회 주최자들인 좌익과 학생들을 검거하기 시작했고, 제주도민들은 이에 항의해 3월 10일 총파업을 벌였다. 제주도청 공무원들을 시작으로 통신, 금융, 교통기관 등이 파업에 들어갔고, 학교 108곳이 동맹휴업을 했다. 3.10 총파업을 본 미군정은 주한미군사령부 정보 보고서에서 “제주도 인구의 60~80퍼센트가 좌익”이라고 기록했고, 미군정 산하 치안 조직인 경무부장 조병옥은 기자회견에서 아무 증거도 없이 “제주도 사건은 북조선 세력과 통모하고 미군정을 전복해 사회적 혼란을 유지하려는 책동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후 1년간 파업 주도자들과 좌익에 대한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이 이어졌고, 약 2500여명이 경찰에 검거됐다. 1948년 3월에는 경찰에 의한 2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1947년 10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 결렬되고, 유엔에서 남한 단독 선거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선거 날짜가 5월 10일로 정해지는 등 계획이 확실해지자 남한의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제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군정은 제주도의 소요 사태를 잠재우고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인 서북청년단을 이용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분단을 돌이킬 수 없게 할 단선과 단정 반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 중지, 통일 정부 수립 촉구 등을 요구로 걸고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미군정은 주한미군사령부 작전 참모가 제주도에 내려와 작전을 지도하고 제주도 내 투표소에 직접 투표함을 운반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거를 거부하는 많은 주민들이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중산간 지역으로 피신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치러졌으나 제주도 3개의 선거구 가운데 2개의 선거구가 투표율 과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미군정은 미군 점령 기간의 핵심 과제였던 5•10 선거가 제주도에서 실패하자 대대적 토벌 작전을 감행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신을 굳건히 하기 위해, 남한 정부는 미국의 원조 약속을 받아내고 국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주도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려 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20일부터 해안선으로 5킬로미터 이외 내륙 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토벌’이 시작된 것이다.

이 토벌대로 파견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 일부 병력은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제주 진압을 거부했다. 여순 반란이 시작되자 이승만은 11월 17일 제주에 계엄령을 선포해 중산간 주민들을 모두 해안가로 강제 이주시킨 뒤 산 지역 집을 모두 불태우고 남아있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이 시기에 참혹한 학살이 제주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해안마을로 끌려온 주민들은 산에 있었으니 무장대를 도와줬다는 혐의로 사살당했다. 정부는 법이 정한 최소한의 절차도 밟지 않고 판결문도 없이 군법회의를 열어 이들을 육지 형무소로 보냈다. 이들 중 일부는 한국전쟁 당시 형무소에서 집단 학살되었고 다수가 행방불명 됐다. 최소 2,530여명이 군사재판을 받았고, 최소 1,320명이 일반재판을 받았다.

4•3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정부는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과거 좌익 활동에 연루된 사람들을 ‘예비검속’한다며 제주지역에서 약 1,150~3,000여 명의 도민을 총살했다.

그 후 4•3항쟁은 반세기 이상 금기의 역사가 됐다. 이후 이어진 친미 반공 독재 정권 하에서 희생자들은 폭도나 빨갱이라는 낙인 하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유족들은 연좌제로 인해 공무원 임용과 공공 기관 입사 등에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우파들은 대한민국 건국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4•3사건을 은폐하고 진실을 입 밖에 내지 못하도록 했다. 무려 1989년까지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버젓이 ‘제주도 폭동사건은 북한 공산당의 사주아래 일어난 남한 교란작전 중의 하나였다’고 쓰여있었다! 약 400여 명을 집단 학살한 북촌리 학살을 다룬 소설 <순이삼촌>의 작가 현기영은 1978년 제주 4•3의 진실을 처음으로 알렸다는 이유로 보안사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우파들의 역사 왜곡 시도

1987년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처음으로 4•3항쟁 진상 규명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참 늦었지만,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표됐고, 2003년 정부 차원의 ‘제주 4•3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왜곡 시도는 이어져 왔다.

얼마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으로 당선된 태영호는 지난 달 제주를 방문해 ‘김일성이 4•3항쟁을 사주했다’고 주장했다. 서북청년단의 후신을 자처하는 한 우파 단체는 4월 3일 제주 4•3평화공원에서 4•3항쟁이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집회를 연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우파도 4•3항쟁 당시 제주도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한 끔찍한 진압과 학살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파는 4•3항쟁을 대다수 민중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외부에 있는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소수의 공산주의자가 꾸며낸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야 학살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정반대다. 오히려 해방 공간, 심지어 미군정이 치른 설문조사에서도 약 70퍼센트의 사람들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새로운 사회 체제로 선택했고, 전평의 자주 관리 운동 등이 벌어졌다. 또한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정서도 압도 다수였다, 따라서 미군정에 대한 불만을 항의로 조직한 것은 많은 주민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승만과 미군정은 소위 ‘건국’을 위해 좌익이 지지를 받으며 주도하는 여러 자치조직들을 파괴해야 했다.

마치 오늘날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윤석열 퇴진 집회가 열리고 정부의 여러 악랄한 정책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 북한 지령에 따른 것이 아니듯, 해방 정국에서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대한 불만과 항의가 항쟁의 배경이었다.

우파들은 남한 단독 선거로 세운 이승만의 ‘건국’을 공산화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낸 행위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4•3항쟁에 대한 학살은 한미동맹이 자유와 민주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오히려 노동자 민중의 자치 열망을 피로 짓밟고 구축된 동맹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4•3항쟁을 기억한다는 것

2023년에 사는 우리가 4•3을 항쟁으로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왜 중요할까. 오늘날에도 한국 정부는 미국 주도 질서를 강화해 그 속에서 나름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한미일 동맹 강화를 껄끄럽게 만드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있다. 가령, 윤석열 정부는 과거사 피해자들이 말하는 역사의 진실을 ‘장애물’로 취급하며 이를 짓밟는 ‘강제동원 해법’을 내놓고 미국과 일본과의 경제적, 군사적 공조를 강화하고 있다.

오늘날 우파들이 이승만의 업적에 새롭게 주목하고 4•3항쟁에 대한 역사 왜곡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이 군사대국화를 추진하며 과거의 전쟁 범죄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한국의 우파들도 한미동맹을 강화하며 한미동맹의 피로 얼룩진 역사를 가리려는 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지금 윤석열 정부는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며 한반도를 더 위험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 특히 제주도는 그 전략적 중요성이 높다는 이유로 미국 MD의 일환인 제주 해군기지가 건설됐고, 최근 윤석열 정부의 환경부는 제2공항 건설 계획을 조건부 승인했다. 국토부는 관광 수요가 늘어나 제2공항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될 공산이 크다. 특히 대만 해협에서 미중 갈등이 고조되고 있어 제주도는 유사시 빠른 대응을 위한 요충지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군사적 갈등에 더 깊이 연루되는 것은 제주 도민들과 한반도 주민들을 한층 더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 4•3항쟁을 기억한다는 것은 한미동맹이 평범한 대중의 희생을 담보로 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이고, 미국이 제공한다는 ‘안보’는 평화를 가져오기는커녕 장기적으로 동아시아와 한반도 전체를 더 커다란 긴장 속으로 몰아넣어왔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오늘날 미국주도 질서에 더 깊숙이 들여가려는 윤석열 정부에도 반대해야 한다.

 

*추천 글

1. 《4•3, 19470301-19540921 기나긴 침묵 밖으로》(허호준, 2023)

2. [고전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제주 4•3항쟁 70주년: 분단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 (김현옥, 2018) 

3. 《최근 한국 현대사: 해방부터 문재인 정부까지》(김동철, 김문성,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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